관객이 묻고, 정지우 감독이 답하다!
너무나 궁금했던 <은교>의 모든 것!
<은교>를 알고, <은교>에 공감하라!
궁금증 풀어줄 정지우 감독 코멘터리 깜짝 공개!
Q. 은교가 유리창을 닦는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나?
A. 유리창은 이적요가 마치 유배된 듯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리창에는 안과 밖이 보이지 않는 ‘더러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은교가 유리창을 닦기 시작하면서 이적요는 다시 세상과 소통하게 된다. 이적요의 생일에 은교가 찾아와 “생일선물로 유리창 닦아드릴까요?”라고 이야기 하는 것 역시 이에 비유하여 묘사한 것이다.
Q. 이적요의 생일 파티를 마치고 이적요가 은교를 안아주자 은교는 이적요의 이마에 뽀뽀한다. 그리고 곧바로 집에 가지 않고, 서지우가 남아있는 서재로 내려가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A. 은교는 소설 「은교」에서 자신을 묘사한 것을 보고 자신이 예쁜 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서지우가 그 소설을 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지우에게 호감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서재로 내려간 것이다. 하지만, 내려갈 당시에는 그 뒤에 이어질 일까지는 예상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장면은 여성관객들이 남성관객들에 비해 조금이나마 더 이해를 하는 것 같다. 나는 이처럼 명백하게 구별되지 않고 궁금증을 남겨줄 수 있는 이야기들이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Q. 소설에서는 은교가 시인의 노트를 태우지만 영화에서는 이적요가 「은교」의 육필원고를 태운다. 어쩌면 영화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왜 그런 결정을 내렸나?
A. 이적요는 자신으로 인해 서지우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살인자라고 생각하고, 살인에 대한 죄책감으로 정말 소중했던 「은교」 원고를 불태우고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킴으로써 스스로에게 징벌을 내린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은교가 이적요를 다시 찾아왔을 때, 보통 사람이라면 뒤돌아서 눈을 맞추고, 다시 얼굴을 보고 싶을 것 같다. 하지만 ‘다시 본다 한들 어찌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노인의 슬픔이다. 마지막 장면을 찍을 때 이적요에게 감정이입이 되어서 정말 슬프고 억울했다. 이적요의 입장에서는 원고를 태우고, 이렇게 스스로 단절시키는 것이 자신의 죄에 대한 징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적요는 조금 더 도덕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Q. 원작소설에서는 헤나가 창(槍) 모양인데, 영화에서는 새의 모양이다. 의도가 무엇인가?
A. 헤나를 통해 가슴을 관통하는 창의 느낌, 심장을 뚫고 지나가는 그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소설 속에서는 ‘창’이라는 텍스트 자체가 주는 느낌이 있기에, 보는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해시켰다. 하지만 이를 시각화하는 과정에서 창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디자인을 해보았지만 ‘포크냐, 삼지창이냐’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각적인 모습이 중요한 영화라는 장르로 만들다 보니 ‘창’이라는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느낌 자체를 표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창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바꾸자고 생각했고, 그것이 바로 ‘새’다. 실제로 영화상에서 이적요의 집으로 새가 날아들어온 장면도 있다. 이적요의 일상에 문득 찾아온 은교 또한 그 ‘새’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Q. 영화 중반, 은교가 체육관에 혼자 앉아 자신의 한쪽 눈을 가리고 네트를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A. 사람의 입장과 상황에 따라 감정이 다르고, 심지어는 자기 마음도 왼 눈, 오른 눈이 달리 보이는 것에 대한 생각을 담고 싶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서지우의 「은교」로 읽었을 때의 낯섦이 느껴졌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