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24
토요일에, 3년 간 못 본 아리에티를 만나려 했으나, GMF라는 곳을 간다 했다. 두근거린다 했다. GMF? 뮤직페스티벌이었다. 이틀 간 열리는 축제에 참가하는 뮤지션들을 확인한 순간, 놀라고 말았다. 이런 큰 행사가 있었는데 난 왜 여태 모르고 살았을까? 우리 회사에서 기간제로 근무중인 선임씨에게 GMF 아느냐고 물었더니, 일요일에 간단다. 그럼 나도 즐겨볼까 해서 일요일에 계란이랑 함께 갔다.
계란은 고등학생 때 우리 잡지 모델이었는데 어느 덧 스물 넷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타인과의 소통이 힘든 아이였는데 어느 새 나와 사는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계란이가 올림픽공원에 30분 늦게 나타났다. 하지만 가을과 축제에 어울리는 예쁜 스커트를 입고 와서 용서해 주기로 했다.
GMF는 영화제처럼 차림표를 보고 밴드를 골라 즐길 수 있는데, 첫 공연으로는 가을방학을 택했다. 인디음악에 조예가 깊은 선임씨가 음악파일까지 주면서 적극 추천을 했기에 잘 모르는 나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공연장은 이미 가득 메워져서 앉을 자리를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겨우 공연장 우측 꼭대기에 돗자리를 깔고 앉을 수 있었다.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예습했던 곡들이 하나 둘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손가락으로 박자를 맞출 수 있었다. 가을과 함께 서서히 나도 무르익어 갔다.
다음 공연장은 3호선 버터플라이. 보컬 남상아가 <질주>라는 영화에 출연도 했었기에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가을방학과는 반대로 파워풀한 공연을 펼치고 있었는데 나도 남들처럼 앞으로 나가 방방 뛰며 음악과 하나가 되고 싶었으나 창피함을 잘 아는 나이이기에 앉아서 발 박자만 맞췄다.
클럽 미드나잇 선셋을 나와 넓은 잔디밭이 있는 민트 브리즈 스테이지를 찾았다. 아침을 거른 터라 다이소에서 장만해 간 노랑 돗자리와 담요를 깔고 커피와 샌드위치를 나눠 먹었다. 예뻐서 산 새빨간 사과 한 알을 계란이에게 건네니 예쁘다며 먹지 않고 집에 가져간단다. 아직 순수의 시대를 살고있구나. 커플들이 눈에 띄었는데 취향을 함께 하는 그들이 부러웠다. 뭐, 어쨌거나 나는 내년에도 혼자라도 올 거다.
배도 채웠겠다 움직였다. 우리들은 앞으론 아까 가을방학 공연이 있었던 수변무대를 벗어나지 말자고 다짐했다. 겁나게 줄지은 인파로 인해 보고 싶은 공연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자리 잡은, 아까보다는 훨씬 좋아진 좌석 위치에서 올리비아라는 싱가포르 가수를 만났다. 오, 이 가수 기럭지가 장난 아니고 미모 또한 치명적인데 노래마저 잘한다. (회사 여직원 둘은 이미 그녀를 알고 있었다) 재즈와 보사노바가 특기인 듯, 순간 연인의 무드로 바꾸어 놓았다. 와인과 함께 하면 더욱 좋을 것만 같았다. (나중에 음반을 사고 말았다!)
다음 공연은 문제의 한희정. 한희정. 한희정! 요즘 이 가수에 푹 빠지고 말았는데 역시 처음에는 외모 때문에 끌렸지만 노래와 사상도 흠모하게 되었다. 예전에 정성일 평론가가 만든 <카페 느와르>에 홍대 인디 여신이라는 요조가 출연한다고 해서 요조 노래를 검색하다가 함께 있는 일본 미소녀 풍의 한 소녀를 보고 내 스타일이다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녀가 한희정이었다. 어머나. 실물도 예뻤다. 후쿠다 마유코를 닮은 그녀의 나이는 31살인데 21살이라고 해도 믿겠다. 키가 생각보다 작았는데 말라서 그런지 작아 보인다는 느낌보다는 귀엽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목소리 또한 왜 이렇게 예쁜지. (그러니까 라디오진행도 했었겠지) 노래 끝나고 중간 중간 툭툭 던지는 말들이 별 얘기가 아님에도 미소짓게 만들었다. 나 빠진 건가? 하하하. 연륜(?)이 있어서인지 털털한 면이 있었는데("작년처럼 일렉기타 두 대로 사운드 조져 버리지 말고…"라는 표현을 쓰셨다) 그 때문에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팬사인회도 하고 콘서트도 한다는데 일단 그녀의 푸른새벽과 솔로 앨범 도합 6장을 지르는 걸로 참기로 했다. (더더 시절 노래는 훗날 지혜랑 선임씨가 파일로 주었음)
턱에 양손을 괴고 박휘순처럼 빠져 든 한희정의 50분 공연이 끝난 뒤 홍대의 원빈이라는 이지형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리허설부터 이십대 여성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더니 공연 끝날 때까지도 사람죽는 소리는 계속 되었다. 노래도 좋고 인물도 좋고 무대의 맛도 알고 뭐 인정한다. 엉덩이 들썩, 양팔도 올라가고, 합창도 이뤄지고 점점 분위기가 좋아진다. 좋다 좋아.
다음 공연은 뜨거운 감자. 같은 시간대의 김윤아로 가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계란이가 김C가 이끄는 뜨거운 감자를 보고 싶어해서 자리를 뜨지 않고 막간에 보다 앞으로 전진했다. 아!!! 원래 이번 페스티벌의 목적은 한희정이었으나 뜨거운 감자에 흥분하고 말았다. 난 김C가 이렇게 멋지고 위대한 뮤지션인지 전혀 몰랐다. 영화 <별빛 속으로>에서 박지윤과 함께 부른 노래를 잠시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 때보다 우주적으로 확장된 공연이었다. 날도 추워지는데 리허설을 오래 하기에 너무 세심한 거 아냐 하고 불만을 가졌는데 십분 간 휴식 후 이어진 공연은 내 생에 가장 뜨거운 순간 중 하나였다. 김C는 리허설 때와는 다른 딴따라 같은 독특한 패션차림으로 무대에 나타났는데 흡사 80년대의 배철수를 연상시키며 뜨거운 감자를 팬들에게 마구 던져주었다. 받아랏, 받아랏. 이소라, 김윤아와 동시간대에 자신의 무대를 편성한 주최측을 탓했지만 뜨거운 관객의 반응에, 간만에 놀 줄 아는 관객이라며 더 높이 뛰고 제 꼬리를 물려는 강아지처럼 뱅글뱅글 돌기도 하였다. 관객들도 더 이상 눈치 보지 않고 모두가 일어나 방방 뛰기 시작했다. 기타 피크를 던져버린 마당에 붙잡힌 앵콜에서도 그는 다 쓰러뜨리고는 영광스럽게 퇴장했다. (아쉬운 건, 뜨거운 감자의 잠정적 중단을 고해 한 동안 그들의 공연을 볼 수 없을 거라는 거다) 심장이 뜨거워져 중간 나는 쓰러질 뻔했다.
계란이도 진정으로 즐거웠다고 했다. 중간에 고백을 부를 때에는 휴대폰으로 그 현장을 친구에게 생으로 들려주기도 했다. 의외로 감성적인 녀석. 우린 아쉬움을 아직 끝나지 않은 이소라 공연장에서 연장하기로 했다. 잔디밭 뒤쪽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이소라가 아름다운 노래를 하는 사이, 우린 와인과 포장 닭살을 찢어 먹으며 털어놓기 쉽지 않은 고민들을 나누었다. 아웅다웅하기도 했지만, 결론은 꿋꿋하게 잘 살자는 거.
일기를 쓰는 지금, 브로콜리너마저를 듣는다. 함께 하는 TOP 더블랙 참 맛나구나. 이사하면 냉장고에 가득 채워 넣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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